• 스웨터업계의 큰 족적 남긴 혜양섬유 고(故) 양문현 회장
  • [2017-10-06]
  • 이상일 기자, sileetex@hanmail.net
필자는 최근 생면부지의 20대 후반의 처자로부터 늦은 밤중에 한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내용인 즉슨 “자신은 고(故) 양문현 회장님의 외손녀로서 어릴적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고, 외할아버지 타계후 섬유 사업을 접게돼 아쉬움이 크며, 따라서 과거 혜양섬유에 대한 저간의 상황과 외조부에 대한 생전활동을 알고싶어 몇 년전부터 외조부님의 지인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으면 했는데 쉽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또한 회고록에 왜 외조부에 대한 기사를 쓰지 않았는지, 살짝 항의(?)겸 부탁을 겸한 내용도 덧붙여졌다. 이 메일을 보고 필자는 2가지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첫째는 오늘날 젊은 신세대가 이처럼 타계한 외할아버지에 대한 남다른 추억과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감성에 대한 기특함과, 그 둘째는 38년간 섬유패션업계에 종사해오면서 나름 자긍심 같은것을 새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헌데 그동안 필자는 ‘근대 섬유 패션 산업을 일군 100人의 CEO들’이라는 연재물을 기획, 집필(현재 50여분 게재)하면서, 최근엔 해외출장과 업계 행사 초청등 바쁘다는 핑계로 몇달간 시리즈를 잠시 쉬어 그야말로 나홀로 법(法)의 직무유기(?)를 범하고 말았다.
이쯤해서 밝혀두건대 그동안 회고록의 주인공 선정은 전적으로 필자의 판단이며, 그 기준은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섬유패션산업발전을 견인하면서 오너로서의 객관적 평가가 관련업계로부터 일정수준 인증되었을때 평가돼야 한다고 본다.
혜양섬유 양문현 회장 같은 경우 섬유사업을 접었던 사례이지만 그분의 생전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뜻에서 이번호 단상으로 기록함을 밝혀둔다. <필자는 양회장님을 빼닮은 미국 유학파 수재인 외손녀와의 집필 약속도 지킨셈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고(故) 혜양섬유(주) 양문현(楊汶鉉)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스웨터업계의 대부(代父)다. 1960년대 이후 가발, 신발산업과 함께 섬유산업은 이 땅의 근간산업이자 수출보국의 핵심주력산업이였다.
이때 섬유산업중에도 스웨터, 와이셔츠(드레스셔츠)가 단연 수출품목 1위였다. 1970년대 이후 90년대 초까지 스웨터산업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때 필자가 출입했던 스웨터 기업중 신원(대표 박성철), 영우통상(대표 양대길), 천지산업(대표 김종성), 유림통상(대표 이윤채), 군자산업(대표 안호준)등의 기라성 같은 기업들이 뇌리에 생생하다. 이들 기업중 현재까지 섬유사업을 하는 기업은 신원 뿐이다. 사료(社料)에 의하면 혜양섬유는 1959년 동광메리야쓰로 출범했다. 그때 미국에 5게이지 스웨터 300장을 선적한 것이 최초의 섬유수출이다. 혜양섬유는 이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큰폭의 성장을 구가한다.
양문현 회장은 한창 전성기 시절인 1990년대 초에 엄청난 돈을 투자해 강원도 철원에 대규모 스웨터 편직공장을 건립하게 된다.
이때 세계적 명성의 일본의 시마세이키, 이태리의 스톨과 줌베르카등 최첨단 횡, 환편기 70여대를 도입해 연간 2백만피스의 스웨터를 생산할 수 있는 독보적 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이후 철원공장이 철수돼 개막식에 참여한 필자로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스웨터사업에 평생 열정을 바쳐온 양문현 회장의 당시 경영비결은 ‘오직 연구와 개발’이다. 이는 오늘날 업계에 회자되고 있는 R&D를 당시 스웨터업계에 최초로 도입한 모범사례로 남고 있다. 퀄리티 위주의 제품수출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온 그의 신념은 ‘15%이하의 마진을 요구하는 바이어와는 절대 거래하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이를통해 미국 굴지의 바이어들인 JC페니, Gap, 바나나리퍼블릭, DKNY, 포슨뉴욕 및 이태리, 프랑스, 유럽 등 유수바이어들은 혜양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국제 비즈니스의 합리적 모멘텀을 보여주기도 했다.
후학 양성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져온 양회장은 결국 2004년 5월에 대장암이 재발돼 타계했다. 1차 수술에 이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에 몰두해오던중 그의 나이 74세에 영면한 것이다. 필자로서는 2002년 9월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에 개설된 패션산업최고과정에서 강사로 나온 그를 휠체어에서 부축한것이 마지막 인연이 되고 말았다.
‘군자(君子)조이 불망(釣而不網), <어진 사람은 낚시를 하되 그물질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서울대 섬유공학과 출신으로 같은과 동기분들인 공석붕(IWS한국지부장, 한국패션협회장 역임)회장과 경세호(전 가희 회장)회장, 전영우(주)대원 그룹 회장 등이 그의 타계를 매우 안타까워 했다.
80년대 당시 신당동 사옥 집무실에서 가끔 만난 양회장은 평소 담배를 즐긴 애호가였고, 이북 평양 출신답게 호방한 성격으로 각종 섬유포럼에 참석, 빠짐없이 질문을 던지는 등 ‘약방에 감초역할’을 한 탁월한 CEO로 추억되고 있다.
더구나 그는 살아생전 탈북한 사람들이나 어려운 이웃들에 대해 참 사랑을 나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였기도 했다.
현재의 양홍섭 대표는 고(故)양문현 회장의 장남으로 혜양 엘리시움 건설본부장, 혜양개발전무를 거쳐 양사의 대표로 근무중이다.
한편 혜양섬유가 모태가 된 혜양 엘리시움은 서울 신당동 혜양섬유 구 사옥터에 대지면적 1,391㎡, 건축면적 17,522㎡에 지하7층, 지상13층 규모로 동대문시장의 대표적인 수출입 및 도매전문상가로 자리잡았다.
혜양 엘리시움의 성공적인 운영에 대해 정통한 시장권리 분석가들은 ‘재무구조가 탄탄한 모기업인 혜양섬유가 100% 지분을 갖고 임대전문상가로서, 특히 관리 회사의 투명한 상가운영과 우수상인 유치를 통해 상가의 비전을 확실하게 제시해 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필자는 고(故) 양문현 회장님의 가업이 대대로 욱일승천(旭日昇天)하길 기원하며, 이참에 한국섬유산업연합회 등 관련 단체에서 고인에 대한 공적을 기려 정부에 공훈을 신청, 추서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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