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길 패션인생 60년, 한국 대표 원로 디자이너 노라노 先生
  • [2016-11-06]
  • 이상일 기자, sileetex@hanmail.net
외길 패션인생 60년, 한국 대표 원로 디자이너 노라노 先生

지난 60년간 외길을 걸어온 한국 대표 원로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그녀는 한국 패션의 산 증인이다. 사람들은 ‘패션계의 전설’ 또는 ‘대한민국 패션의 지존’이라는 찬사를 보내지만 본인은 정작 ‘도전을 즐기는 건달’일 뿐이라 얘기한다.

올해로 87세 현역 디자이너인 노라노 선생의 패션 인생은 공백 없이 60년이다. 그녀의 패션 인생은 열정으로 뭉쳐진 ‘이유 있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1928년 서울에서 출생해 유복한 성장기를 보내고 1947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녀는 불철주야로 디자인 공부에 매진했다. 1952년에는 서울 명동에 부티크 ‘노라노의 집’을 연 뒤 대한민국 1호 패션 디자이너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1956년에는 반도호텔에서 국내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으며 1963년엔 미도파백화점에서 국내 최초로 기성복 패션쇼를 개최한 그는 1970년부터 73년까지 연속 프랑스 파리프레타포르테쇼에 참가해 한국패션의 우수성을 알렸다.

이후 1970년대에는 기성복에 도전, 1979년에는 한국산 실크로 제작한 노라노 기성복으로 뉴욕 메이시 백화점의 15개 쇼윈도를 장악했다.

1978년 (주)예림양행을 설립, 미국 7번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홍콩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카피하는 유명 브랜드가 됐다. 이를 통해 그녀는 특별한 노라노만의 기술이 절실함을 인식, ‘패턴은 어렵게, 봉제는 쉽게’를 모토로 봉제선을 최소화하면서도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 차별화를 시켰다.

프린트 공장을 시작하며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됐다. 프랑스에 가서 미술 서적을 직접 사와 시대에 맞는 프린트를 직접 찍어냈다. 그것이 바로 미국 수출의 15년을 지탱해준 ‘엔지니어 프린트’의 탄생이다. 엔지니어 프린트가 대 히트를 치면서 1년에 네 번에서 다섯 번 현지에서 컬렉션이 진행됐다.
3대에 걸쳐 노라노의 옷을 입고 고마워하는 고객이 노라노에는 유달리 많다. 노라노 패션의 매력은 무엇일까.

언젠가 미국 기자는 ‘노라노 옷의 매력은 잘 절제된 엘레강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에 노라노는 ‘튀면 이미 멋이 아니다. 진정한 멋은 절제돼야 한다.’라고 답했다.

격동기 속에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를 열어온 그녀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영부인들과도 인연이 깊다.

의상은 오직 ‘노라노’ 것만 입었던 영화배우 엄앵란을 비롯해 최은희, 김지미, 조미령, 도금봉 등이 그녀의 단골손님이었다.

노라노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에 미니스커트도 판탈롱도 없었을 것이다.

윤복희의 A라인 미니드레스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패션도 그녀의 손에 의해 탄생됐다.

혹자는 ‘파리엔 샤넬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패션사를 열어준 노라노가 있다.’라고 얘기할 정도다.

육영수·이희호 여사 등 역대 영부인들도 노라도 의상을 즐겨 입었는데 그중 노라노가 가장 많이 의상을 제작한 영부인은 육영수 여사다.

특히 1962년 한·독 차관 협정과 관련해 서독으로 박 대통령 내외가 떠날 때 제작한 순모 코트 앙상블은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중요한 일을 하러 가셔서 특별히 국내 양모 원단으로 만들었다. 제주도 ‘한림수직’에서 울 소재를 개발, 양을 키운 양털을 깎아 수직으로 짜낸 울을 가지고 원피스와 코트를 만들었다. 자연 그대로의 색상이어서 세련되고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라고 노라노 선생은 당시를 회고했다.

노라노는 지난 2013년 ‘패션 인생 60 주년’을 기념한 전시회 ‘라 비앙 로즈(장미빛 인생)전’을 열기도 했다. 이 전시는 대한민국 1회 패션 디자이너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60년 인생과 대한민국 패션사를 되짚어보는 전시였다.

이 전시를 위해 국내외에 있는 노라노 의상은 시대별로 고객의 기증 등을 통해 수집됐다. 400벌 가까이를 모아서 엄선, 연대별로 60벌이 전시됐고 10대부터 90대까지 연령층과 직종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성황리에 마쳤다.

노라노 선생은 이 전시회에서 “패션 인생을 조명하기보다 현재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각 분야의 기초를 잡은 분들의 의상을 보여주고 젊은이에게 패션의 뿌리를 찾아주고자 했다.”라며 “할머니와 딸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어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라고 말씀해주실 때 가슴이 뭉클했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놀고먹는다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노라노 선생은 말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패션을 위해 달려온 인생이 지겹지는 않을까. 그녀의 넘치는 정열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그녀는 패션을 두고 밤낮 사치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에 상처가 됐다고.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도전하는 사람일 뿐 야심은 없었다. 굳이 ‘1등을 해야 된다’, ‘돈을 많이 벌어야 된다’라는 목적의식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도전의식이 뒷받침된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노라노 선생은 후배들에게 말한다. “‘유럽 공략, 미국 진출, 해외 나가기 위해 지원이 부족하다.’라는 이야기들이 많다. 진출과 지원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철저한 연습으로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조언한다.

경기여고 출신으로 지난 2008년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런 경기인상’ 수상을 필두로 2010년 제3회 코리아패션대상(대통령표창), 2011년 제1회 한국패션100년 어워즈에서 패션디자이너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으면 행복해 질 수 있다”며 말하고 있는 원로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격동기 속에서 대한민국 패션의 역사를 열고 패션이 사치 산업이라 치부하던 80년대를 뛰어넘어 80대에 들어서도 또 다른 도전과 꿈을 꾸는 노라노 선생의 외길 인생은 이 시대의 진정한 멘토이자 패션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李相一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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